알큰하게 취한 장마철 여름 밤-『여름밤, 비 냄새』리뷰
오늘도 어느 날

알큰하게 취한 장마철 여름 밤-『여름밤, 비 냄새』리뷰

by 하노(hano)

 

 본격적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태원 해방촌에 위치한 STORAGE BOOK & FILM이라는 독립 서점에서 출간된 독립 서적임을 밝혀야 할 것 같다. 독립서적임을 밝히는 이유는 독립출판물의 특성 상 누군가에게는 맞춤옷 같이 딱 맞는 안락할 수도 있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불편한 옷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 <벌새> 리뷰를 하며 말한 적 있다. 때문에 나의 리뷰 글이 항상 그렇지만 이번에는 더욱 개인적인 감상임을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다.

 

  예술은 작가 또는 감독이 느끼고 생각한 바를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 객관화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작품은 창작자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작 과정은 외롭고 고된 과정일지 몰라도 창작물이 완성된 이후에는 창작자의 손을 완전히 떠나간다. 누군가 그 창작물을 보고 듣고 감상해야지만 작품은 의미를 갖게 된다. 만약 창작자의 주관만 담긴 글을 읽게 된다면 매우 당혹스러울 것이다. 글의 설득력이 떨어지고 독자의 이해가 어려워지고 무엇보다 독자는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처음으로 서사를 지닌 창작을 하는 초보자들의 글에서 종종 나타나는 일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고 싶어 하지 누군가의 일기장을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출처: https://han-oneday.tistory.com/3 [오늘도 어느날]

 

 이 책은 비가 많이 내리던 여름날, 작가가 코가 동그랗고 비에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를 짝사랑하며 쓴 짧막한 글과 일기를 묶어낸 이야기다. 내가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함께 비를 피해 술집에 들어가던 날 밤, 그 남자를 기다리던 단골 서점, 친구들에게 조차 연정을 밝히지 못하던 나날들의 단편적인 순간들이 물기를 잔득 머금고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은 책이었다.

 에필로그에서 김현경 작가는 책을 다 읽고 누군가는 "어? 이게 뭐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책이랬지만, 읽는 내내 볼이 발그레해질 정도로 맥주를 마신 것처럼, 약간 취해 붕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랬던 이유는 내가 비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작가가 짝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서정적인 문장으로 몽글몽글하게 풀어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에서 작가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는 없지만, 꽤 오래 출판 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임을 엿볼 수 있다. 출판 업계에 근무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문장이 수려하면서 정확하다.

 작가가 에필로그에 걱정을 내비쳤던 것처럼 결말이 허무하기는 하다. 하지만 여러 파편적인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인상 깊은 글을 각각 따로따로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인 책이다.

 책의 초반부에 '라벨론'이라는 것이 나온다. 어떤 사람에 대한 추억이나 기억 때문에 어느 사물이나 단어, 개념에 그 사람의 이름이 붙는 것이 라벨론이다. 나는 이제 장마철이면 『여름밤, 비 냄새』이 떠오를 것 같다.

 그녀에겐 가본 적 없는 애리조나에 누군가의 이름이 쓰인 라벨이 붙어있다 말했다. 애리조나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듣게 되면 그녀는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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