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리뷰 - 가장 주관적인 것을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오늘도 어느 날

<벌새> 리뷰 - 가장 주관적인 것을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by 하노(hano)

 

 

 

영화 벌새 메인 포스터

 

 

 

들어가면서

 

  모든 예술 작품은 주관을 객관화시키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예술은 작가 또는 감독이 느끼고 생각한 바를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 객관화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작품은 창작자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작 과정은 외롭고 고된 과정일지 몰라도 창작물이 완성된 이후에는 창작자의 손을 완전히 떠나간다. 누군가 그 창작물을 보고 듣고 감상해야지만 작품은 의미를 갖게 된다. 만약 창작자의 주관만 담긴 글을 읽게 된다면 매우 당혹스러울 것이다. 글의 설득력이 떨어지고 독자의 이해가 어려워지고 무엇보다 독자는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처음으로 서사를 지닌 창작을 하는 초보자들의 글에서 종종 나타나는 일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고 싶어 하지 누군가의 일기장을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최근 출판계에 불고 있는 에세이 열풍이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이다. 누구나 글을 쓰고 출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은 달가운 일이지만 너무나 많은 에세이 출판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수준 미달의 출판물들이 많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에세이 작가들이 범하는 실수가 객관화 작업을 빼먹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담과 생각을 되는대로 받아 적어놓은 글은 작가의 자기만족일 뿐 독자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한다. 누군가는 그 글을 읽고 큰 공감을 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읽고 싶지 않았던 남의 일기장을 억지로 읽게 되는 불쾌한 경험을 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내 생각에) 독립영화를 보는 것은 에세이를 읽는 것과 비슷하다. 많은 독립영화는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생각에서 시작하거나 또는 그 자체를 재현한다. 그래서 독립영화의 평점은 극과 극으로 나뉜다. 누군가는 나의 이야기를 대신해준 것 같은 시원함을 느끼고 누군가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에세이가 보편성을 지니지 못한 것은 아닌 것처럼 독립영화 중에서도 보편성을 지닌 작품들이 있다. 대한민국에 독립영화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벌새>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단절된 주인공

 영화의 배경은 1994년 서울이다. 1994년 서울은 매우 혼란했다. 기록적인 폭염이 대한민국을 강타했고 이 기록은 24년이 지난 2018년이 되어서야 깨졌다. 지존파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며 전국이 충격에 휩싸이고 가을에는 성수대교가 무너져 수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다. 은희는 그런 서울의 중심 강남에 살고 있는 중학생이다. 은희는 연립식 아파트 현관에서 도어벨을 무수히 누르고 악을 쓰며 엄마를 부르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다. 굳게 닫힌 철문은 무심하기만 하다. 은희는 뒤늦게 엉뚱한 집의 벨을 누르고 있었음을 깨달는다. 이 짧은 오프닝 시퀀스에 은희의 단절된 상태가 보여진다.

카메라

 <벌새>의 촬영에 있어서 두 가지 특징이 눈에 띄었다. 아웃포커싱과 머물러있는 카메라다. 일반적으로 카메라의 초점은 중요 인물을 따라간다. <벌새>에서는 초점이 인물에 잡혀있지 않고 어느 한 지점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인물들이 이동해서 초점 범위에서 벗어나더라도 카메라는 인물을 쫓아가지 않고 그대로 멈춰서 있는다. 프레임 한에 두 인물이 근거리에 있더라도 초점 범위를 최대한 좁혀서 한 인물에게는 초점이 맞고 다른 인물에게는 초점이 약간 어긋나 있는 장면들도 많이 연출되었다. 은희가 한문학원 원장 선생님에게 대드는 장면에서는 이러한 연출이 최대한으로 활용되었다. 은희가 원장 선생님과 대드는 씬에서 원장 선생님의 얼굴이 흐릿하게 등장한다. 이러한 연출로 이 두 사람이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는 것을 표현해냈다.

 

 

원장선생님에게 대드는 은희

 

 

 

인물이 프레임에서 벗어난 뒤에도 머물러 있는 카메라

 

 

 픽스 샷도 자주 연출된다. 인물들이 프레임 아웃하더라도 카메라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무르며 1~2초 정도 인물들이 사라진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벌새>는 기본적으로 상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소중한 사람이 사라진 뒤 남겨진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은희는 영지 선생님이 사라진 세상에 남겨지고 은희의 엄마는 오빠(은희의 삼촌)를 잃었다. 인물들이 사라진 뒤에 배경을 담는 화면은 이러한 세상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영화의 초반부에 은희의 삼촌이 죽기 전에 은희 집에 방문하는 시퀀스에서 삼촌이 집을 나가는 장면은 영화의 주제를 잘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카메라는 삼촌이 나간 뒤 아무도 없는 현관문에 한참 동안 머물러있는다. 현관문의 센서등이 꺼지고 나서야 컷이 전환된다.

공간

 은희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집안의 관심은 온통 우등생인 오빠에게 집중되어있고 은희는 뒷전이다. 학교에서 은희는 날라리 취급을 받는다. 좁은 방을 언니와 공유하고 있어 사생활이 보장되는 개인 공간도 갖지 못했다. 심지어 언니는 밤이 되면 가족 몰래 날라리 남자 친구를 방에 몰래 데려온다. 그 어디에도 은희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은희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불편하다.

 병원에 입원한 은희가 6인실임에도 불구하고 더욱 편안해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때, 유리라는 무조건적으로 은희를 좋아해 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은희는 조심스럽게 커튼을 친다. 커튼을 치자 병실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텔레비전 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이 커튼 속 공간은 다른 곳과는 단절된 두 사람만의 아지트가 된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두 사람만 이곳에 있다.

 

밝고 따스한 시선

 

 

혹 제거 수술 후 자신의 혹이 어디로 사라졌냐고 묻는 은희

 

 

 영화 중반부 은희는 혹 제거 수술을 받는다. 수술을 받고서 은희는 비몽사몽 한 상태로 자신의 혹이 어디에 갔느냐고 묻는다. 누군가 버렸다고 대답해주자 은희는 어디에 버렸느냐고 되묻는다. 이처럼 이별을 때때로 영문도 모르는 사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진다. 그래서 이별은 갑작스러운 것이다. 사라진 혹이 은희 귀 뒤편에 흉터를 남긴 것처럼 이별은 상흔을 남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혹을 잃어버린 것처럼 은희는 뒤에서 영지 선생님의 비보를 듣는다. 영지 선생님의 죽음은 영지의 마음에 커다란 흉터를 남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은희는 영지 선생님이 남긴 가르침으로 성장해나가며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은희는 이제 엄마에게 외삼촌을 보고 싶냐고 물을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철거민 주거지역을 지나가며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동정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마지막 가족 식사 쇼트는 은희를 바라보다가 은희를 중심으로 점차 줌 아웃되며 가족들의 모습으로 확대된다. 더 이상 식탁에서 대화는 아빠의 일방적인 소통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의사소통이 되었다.

 영화 곳곳에서 등장하는 푸른 녹음과 하늘, 따스한 느낌을 주는 자연광은 영화를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로 만들어준다. <벌새>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간 영화다. <벌새>를 보면서 감독이 자신의 10대를 되돌아보는 느낌이었다. 감독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과 시선이 이토록 따스하고 상냥한 것이다.  나 역시도 언젠가 나의 과거를 이처럼 따스하게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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