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한강 리뷰 - 소설의 역활
오늘도 어느 날

『소년이 온다』,한강 리뷰 - 소설의 역활

by 하노(hano)

 

『소년이 온다』,한강 장편 소설

 

 

1. 어떤 기억은 특정한 시기가 되면 매번 돌아온다. 여름에 난 생 처음으로 가족 모두와 해외여행을 갔다면, 기억은 특정한 시기가 되면 매번 돌아온다. 여름에 난 생 처음으로 가족 모두와 해외여행을 갔다면, 녹음이 짙어지는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때로는 어떤 일을 잊지 않기 위해 특별한 행사를 만들기도 한다. 잊지 않으려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사건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상을 잊지 않기 위해 기일마다 매년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어떤 기억은 방사는 물질처럼 사람의 DNA를 완전히 변화시켜 죽을 때까지 계속 괴롭히기도 한다.

2. 미안마 군부 쿠데타가 벌어지고 시민들의 저항이 시작된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떠올렸다. 때로는 어떤 사건이 지난 사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특히, 트라우마적인 기억이라면 더욱 그렇다.

3. 1980년 5월의 광주를 경험한 사람보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아지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수능을 보고서 시험을 망쳤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곧바로 광주행 기차표를 끊었다. 일종의 도피 여행이었다. 나는 항상 광주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본관이 광주에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왠지 모를 친밀감이 느껴졌다.

4. 그렇게 도착한 광주는 나의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보는 광역도시였기에 나름의 기대가 있었다. 당시 내 생각에 광역시는 서울만큼 발전하고 큰 도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광주는 생각만큼 크지고 않았고 구경할 것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할 게 없다는 이유로, 가벼운 마음으로 5.18 민주 묘지에 갔다.

5. 버스를 타고 내린 국립 5.18 민주 묘지는 나의 가벼운 마음과는 달리 무척 엄숙했다. 항상 어딘가 들떠있는 19살의 마음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분위기였다. 내가 가본 그 어느 곳보다도 고요하고 무거운 장소였다. 충장로 거리가 어땠고 시청이 어땠는지 말로는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나는 완전한 타인이었다. 나는 그때서야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알았다.

6.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의 광주를 통과한 여섯 사람의 시선을 옴니버스 방식으로 풀어냈다. 중학생 동호는 친구 정대가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한다. 공포에 그대로 달아나버린 동호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날부터 동호는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돕는다. 실종된 누나 정미를 찾다가 시위 행진 중 총에 맞은 정대,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동호, 열아홉 살이었던 은숙, 목숨은 건졌지만 영혼이 깨져버린 김진수, 부채감을 안고 살아간 김성희, 동호의 어머니는 각각 5월을 건너오지 못한 아이, 살아남았지만 평생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트라우마로 스스로 삶을 포기한 사람,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시점으로 잔혹했던 광주를 조명한다. 현장의 생생한 묘사는 잔혹하지만 담담한 필체로 그날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7. 1980년의 광주만이 아니라 5월은 건너온 사람들의 고통스럽게 이어지는 삶에도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날 죽은 목숨은 생명만이 아니었다. 살아남았더라도 영혼이 파괴되어 버린 이들도 있었다. 인간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를 목도한 이들, 인간이 아닌 고깃덩어리 취급을 받은 이들, 이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인간이란 원래 의미 없는 고깃덩어리인가, 원래 잔혹성을 타고난 카인의 자손들인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어때야 하는가? 운동은 끝났더라도 계속 이어져오는 폭력 아래 무력감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소년이 온다』,135쪽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207쪽


8. 역사를 읽는다고 그 안에 사람들의 삶을 알 수는 없다. 역사는 그저 사실에 불과하다. 역사는 객관적이며 집약적이다. 역사 속 사람들의 삶을 훔쳐보기라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소설의 역할이다. 소설을 통해서 과거의 사람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은 이어진다.
 

9. 중학교 2학년 종업식 날 담임 선생님에게 책 선물을 받았다.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다. 책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 책은 선생님이 한 때 열 번 이상 읽고, 베껴 쓰던 '고전'이란다. 3학년 교과서에도 실려있지. OO이라면 언젠가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며 가슴 아파하고 분노할 수 있을 거야. 다른 사람에 대한 동감과 이해처럼 인간에게 필요한 덕목이 또 있을까? 지금보다 더 멋진 어른이 되어있을 OO이를 기대하며.

  이 선물을 받은 이후로 나는 줄곧 담임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멋진 어른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그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사람이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읽고 난 뒤 나는 조금 그런 어른에 가까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하루빨리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참극이 끝나기를 바란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 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소년이 온다』,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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