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10] 비 내리는 날, 밤산책
by 하노(hano)
오늘 아침 일어나고 보니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눈을 마저 다 뜨지 못한 채, 저는 '비가 그쳤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를 좋아한다. 이슬비도 좋고 때리듯 쏟아지는 장대비도 좋다. 하루 종일 며칠 몇 날을 내리 내리는 장마도 좋고 잠시 왔다가 도망가는 소나기도 좋다. 빗소리도 좋고 비 냄새도 좋다. 비 내리는 날 생기는 뿌연 비 안개도 좋다. 예전부터 비를 좋아했다. 비 오는 날의 풍경 모두를 사랑한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비를 왜 좋아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나는 텔리비젼을 하루 종일 켜 뒀다. 집안에 울려 퍼지는 고요함이 싫었다. 고요는 집 어느 곳에 있어도 내 귓속에서 들렸다. 그 고요를 버티기 위해 텔레비전 방송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필요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텔레비젼을 켤 필요가 없었다. 빗소리로 충분했다.
어제는 카메라를 들고 밤산책을 나왔다. 불렛 저널에 코로나가 종식되면 하고 싶은 일들의 리스트를 적은 적이 있었는데 적다 보니 그냥 하고 싶은 것들을 마구잡이로 적은 것이 됐다. 그곳에 비 오는 여름밤에 밖에서 맥주 마시기가 적혀있었다. 운동도 하고 컨디션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산책을 했다가 편의점에서 음료수 한 캔을 사 마시는 것으로 대신했다.
동네를 가볍게 돌며 비오는비 오는 날의 밤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비 오는 날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우산 쓰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비에 젖은 나무와 풀, 비 안개, 아스팔트 위에 고인 빗물. 아스팔트 도로 위에 빗물이 고이면 지상의 빛을 반사한다. 그러면 두 개의 빛이 보인다. 비 오는 날에만 찍을 수 있는 사진이다. 검은 거울이 된 것처럼 세상을 비추고 있는 바닥. 그리고 붉은색 궤적을 바닥에 남기고 달리는 자동차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빗물에 젖은 발부터 닦아야 한다. 그 전에 하는 일이 있다. 우산을 펼쳐서 잘 마를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펼쳐진 우산을 보니 생각났다. 어린 시절에 비가 많이 온 날이면 집안에 펼쳐진 우산이 가득했다. 우산의 물기가 마르고 나면 우산을 겹쳐서 작은 우산 집을 만들곤 했다. 그 안에 장난감이나 인형을 들고 들어가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나만의 세계였다. 그 좁은 공간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비를 좋아하는 것은 이런 즐거운 기억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비가 주는 고립감이 있다. 예전에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폭우가 너무 심하게 내리는 바람에 친구들과 다 같이 실내에 갇히는 에피소드를 본 적 있다. 무의식적으로 그 에피소드를 좋아했던 것 같다. 기억에 강렬히 각인된 기억은 아니지만 무의식 속에 남은 것 같다. 고립된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그 순간만큼은 함께 해야 한다. 고립으로 되었기 때문에 함께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비가 내리는 날은 여전히 내게 외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비는 어쩐지 춥지만 따뜻하다.
비를 좋아하는 원인이 된 세 가지 기억 모두 외로움과 관련있다. 이렇게 보니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 맞는 것 같다. 지금도 비를 좋아한다. 비 냄새, 빗소리, 비가 오는 풍경도 좋고 비가 내린 뒤 어수선한 분위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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