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일기
오늘도 어느 날

스무 살의 일기

by 하노(hano)

※ 이 글은 『글쓰기의 최전선』의 서문과 1장을 읽던 중에 갑작스럽게 떠올라 적게 되었습니다 

※ 독자를 저 자신으로 상정했기에 반말로 진행됩니다


 

 

 

 항상 나의 스무 살은 언젠가 풀어야 할 마음의 숙제로 남아있었다. 정확히는 스무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3년간의 일이다. 일이 지나고 난 직후에는 그때 감정을 마치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역처럼 취급했다. 너무나 여리고 섬세한 것이라 봄바람만 불어도 깨지는 것처럼 여겼다. 그 감정들을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겼던 것도 같다. 그렇게 1~2년이 지나자 나는 그 감정들을 한 단어로 축약해버렸다. 그러고는 별 것 아니었다는 듯이 잊으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그 감정 위로 많은 퇴적물이 쌓였다.

 스무살이 되고서 7년이 흘렀다. 일곱 살이면 아이가 한글을 떼고 나름의 논리를 갖추기 시작하는 나이이다. 소설가 김연수도 자신의 스무 살을 설명하기까지 6년이 걸렸다. 나도 이제 비로소 말문이 트이고 올바로 나의 스무 살을 바라볼 수 있는 나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강의가 끝나고 나면 나는 곧바로 기숙사 방으로 들어갔다. 2인실이었던 방은 책상 2개와 침대 2개가 들어갈 자리만 있었다. 그래도 방을 쓰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4학년으로 편입생이던 룸메이트 형은 방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입사한 뒤 두어 번 밖에 보지 못했다. 방에 들어온 뒤에 나는 외투를 의자에 걸어두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오지 않을 연락을 기다렸다. 오후를 그렇게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보냈다.

 저녁이 되면 기숙사를 나와서 밥을 먹으러 갔다. 기숙사는 높은 언덕 안 쪽 깊숙이 있어서  식당까지 한참을 내려와야 했다. 기숙사 식당 밥은 너무 맛이 없었다. 식당을 공유하는 고등학생 학생들도 끼리끼리 모여 분식을 먹으러 나갔다 오곤 했다. 나는 저녁을 혼자 먹을 때가 많았다. 혹은 굶을 때도 많았다.

 저녁을 먹지 않은 날에는 새벽이 되면 허기를 참기 어려웠다. 그럴 때면 새벽에 기숙사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컵라면 자판기가 있었다. 모아두었던 동전을 모아 700원을 만들었다. 월말이면 10원짜리까지 합쳐서 겨우 600원, 700원을 만들었다. 그렇게 모은 동전을 자판기 투입구에 넣어서 컵라면 하나를 샀다. 새벽에 혼자 방에서 컵라면을 끓여먹었다.

 저녁을 기숙사 식당이나 밖에서 해결하고 온 날에는 방으로 돌아와 다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동기 단톡 방에 술자리가 있다고 하면 외출할 준비를 했다. 갈 수 있는 술자리는 모두 나갔다. 환영받지 못하는 자리라도 술자리에 동석했다. 술 자리에 나가면 사람들과 웃고 떠들 수 있었다. 기숙사 통금 시간을 넘기는 일이 부기 지수였다. 통금을 넘기면 새벽까지 밤 새 가며 술을 먹거나 노래방에 갔다. 술자리가 없는 날에는 운동장 계단에 앉아서 편의점에서 사 온 캔맥주를 마셨다. 한겨울 중에도 운동장을 도는 사람들을 보며 맥주를 마셨다.

 또 나는 친구들을 방 앞까지 바래다 주는 일이 많았다. 해가 지면 언덕은 캄캄했다. 설치된 가로등 하나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 후레시를 켜지 않으면 한 걸음도 갈 수 없었다. 하지만 어두운 언덕길보다도 밝은 기숙사 방이 더 무서웠다. 어느새 나는 핸드폰 후레시를 켜지 않고도 한밤 중의 언덕을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1년 동안을 이렇게 지냈다.

 이 주절거림은 글이 아니라 글감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나의 스무 살은 그저 조금 외로웠을 뿐이다'라고 일축하던 그때 일을 이렇게 서술하게 될 수 있음만으로도 큰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나의 스무 살의 글감을 모으다 보면 언젠가는 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글쓰기는 시간이 흘러 층층이 쌓인 퇴적물을 치워내고 조심스럽게 그때 기억을 꺼내어보는 일 같다. 혹시 나와 비슷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경험이 있다면 이 글을 읽고서 그렇게 외로운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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