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담긴 기억 - 신촌/이대 필름포럼
오늘도 어느 날

공간에 담긴 기억 - 신촌/이대 필름포럼

by 하노(hano)

신촌에 위치한 '필름포럼' 영화관

 

 

 필름포럼 가는 길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극장은 신촌에 있는 필름포럼이다. 이대역에서 내려서 2번 출구로 나온다. 그러면 이대 정문까지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상가가 조성되어 있어 거리에 사람이 많은 편이다. 눈대중으로 가게 구경을 하며 사람이 바글바글한 거리를 통과하면 바로 이화여대 정문이 나온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이화여자대학교의 자랑인 도서관과 대강당이 보인다. 특이한 구조로 시선을 사로잡는 도서관은 해가 졌을 때 비로소 본모습을 보인다. 양쪽 벽면 전체가 유리로 되어있어 오렌지빛 등이 켜지면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그 사이를 지나가면 마치 불빛을 사이를 통과하는 기분이다. 늦은 시간 학업에 열중하는 학생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풍경일 것이다.

 도서관으로 가지 않고 도서관 뒤편으로 이동한다. 제법 높이가 있는 계단이 보인다. 힘겹게 계단을 오르면 대강당이 보인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회백색 건물이다. 대강당을 지나쳐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후문이 나온다. 후문으로 나와 이대부중 방향으로 내려간다. 횡단보도가 나오면 신호를 기다리다가 길을 건넌다. 그러면 연세대학교 동문회관 건물이 보일 것이다. 그 건물 반대 방향으로 올라간다. 빵집과 카페를 지나면 붉은 벽돌로 지어진 빌딩이 보인다. 드디어 그곳에 필름포럼에 도착한 것이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서 한 층만 내려가면 필름포럼이다. 하지만 나는 건물 뒤편으로 돌아간다.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지하로 내려가는 나선형 계단이 있다. 나는 그 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길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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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포럼으로 내려가는 계단

 비밀스러워 보이는 느낌을 주는 계단이다. 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몰래 비밀기지에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카페처럼 보이는 가게가 보인다. 검은 테두리를 가진 곡선을 그리는 전면 유리창,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스한 불빛과 창 너머로 보이는 목재 탁상. 지하라고 이야기했지만 천장이 뚫려있어 햇빛이 들어오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 카페처럼 생긴 이곳이 필름포럼이다.

 필름포럼까지 가는 길을 복잡하게 설명한 이유는 이 경로가 내가 필름포럼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상가가 밀집한 도심을 지나 예스러운 캠퍼스를 통과한 뒤 비밀스러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나타나는 공간. 이 경로만으로도 무척 매력적이다. 

 필름포럼에는 상영관이 딱 2개뿐이다. 두 상영관 모두 좌석이 100석이 채 되지 않는다. 필름포럼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상영에 있어서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멀티플렉스에서 느낄 수 없는 아늑함이 있다. 멀티플렉스에서 아무리 특수관을 지어도 이 아늑한 감정은 줄 수 없다. 작은 규모에서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 있다. 상영관이 적다 보니 상영하는 영화에 대한 신뢰감도 생긴다. 하루에 몇 번 밖에 상영을 못 한다면 어떤 영화를 상영할지 고민될 테고, 이곳에서 상영되는 작품들은 선별된 누군가가 큐레이팅 한 것이다. 비밀스러운 통로와 작은 규모가 주는 이 느낌이 필름포럼에 있다.

 

  다시 찾은 필름포럼 

 이 작은 영화관을 마지막으로 간 것이 2015년도쯤이니까 5년 만에 다시 찾은 셈이다. 2020년 2월 6일 필름포럼에 갔다. 멀티플렉스에서는 상영 중지된 <벌새>와 <메기>,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상영 중이기에 오랜만에 찾았다. 5년 만에 가는 길이었지만 익숙했다. 이 공간이 오늘은 내게 어떤 감동을 줄지 부푼 기대감을 품고 그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심장이 뛰었다. 기대하던 느낌 그대로였다. 문을 열고 영화관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모든 감정이 깨져버렸다.

 이 영화관이 원래 이렇게 개방감 있던 공간이었나? 원래 이렇게 널찍해 보였었나? 뭔가 느낌이 달랐다. 나만의 아늑한 비밀기지 같은 느낌이었는데, 좀 더 커지고 상업적으로 변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예매하고 의자에 앉아서 두리번거리며 기억을 샅샅이 되살펴봤다. 구조가 바뀌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원래 이랬던 것 같다. 근데 왜 느낌이 다르지? 공간은 그대로이고 내가 변한 걸까? 의문이 계속되었다.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공간에 각인 된 기억

 주말에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던 중 인상 깊은 묘사가 있었다. 홀든이 초등학생 시절 매주 토요일마다 다녔던 박물관에 대한 기억이다.

 콜럼버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사탕이나 껌 같은 것을 잔뜩 가지고들 있었기 때문에, 강당 안은 항상 달콤한 냄새가 가득하곤 했다. 그 냄새를 맡으면 밖에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비가 오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편안한 곳에 와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호밀밭의 파수꾼』, 162쪽)

 아 이 느낌이다. 묘사를 읽기만 해도 공기 중에 퍼지는 은은한 냄새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내가 필름포럼에 대해 갖고 있던 감정이 바로 이런 감정이었다. 이 구절을 읽고서 옆에 '나는 왜 필름포럼을 아늑하다고 착각했었나'라고 적었다. 기억 때문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수요일에 학교를 빨리 마치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피부가 간질간질한 느낌. 묘하게 고요한 학교를 등지고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친구들과 작별 인사하고 웃는다. 햇살이 따스하다. 잎이 무성하게 자란 나무 아래로 그늘진 길을 걷는다. 그때 본 화단에 있던 풀잎 색까지 기억나는 듯하다. 누구나 공감할만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때때로 그 느낌을 떠올릴 수는 있지만 지금 다시 그 길을 걷는다고 매번 그 느낌을 느낄 수는 없다.

 내가 필름포럼을 처음으로 간 것은 19살에서 20살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그때 친구와 나는 1시간을 걸어서 이대역에 도착했다. 12월이었기 때문에 날씨가 추웠다. 이대역에 도착하자 친구가 영화 시작 시간에 늦을 것 같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우리는 뛰었던 것 같기도 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겨울에 서울 한 복판을 한 시간 동안 걸은 뒤라 숨이 찼다. 숨이 찬 와중에도 친구는 이대 도서관이 밤에 얼마나 이쁜지에 대해 그리고 저 안에도 아트하우스 모모라는 영화관이 있다는 것을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나는 이 친구를 좋아했다. 우리는 정신없이 필름포럼까지 뛰어갔다. 들어가서 친구가 영화표를 발권했다. 직원이 이미 상영이 시작되었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괜찮다고 말하고 직원의 안내에 따라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여태 내가 가 본 상영관 중에 가장 작은 상영관이었다. 우리는 맨 뒷자리 중간쯤에 앉았다. 그때 우리가 본 영화는 <서칭 포 슈가맨>이라는 다큐멘터리였다. 미국의 거리가 나오는 장면에서 그 애가 귓속말을 했다. '영상미가 좋다'

 이 기억이 내가 필름포럼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기억이다. 처음 가본 낯선 길을 좋아하던 애의 이끌림으로 따라 걷고 정신없이 도착하자마자 조심스럽게 커튼을 젖히고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 넘게 추위 속을 헤매이다 실내로 들어갔으니 무척 따뜻했다. 커튼을 열고 보니 무척 아기자기한 공간에 사람도 몇 사람 없었다. 그러니 내 기억 속에 필름포럼이 아늑한 공간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홀든이 박물관에 갈 때마다 초등학생 시절에 맡은 달콤한 냄새를 떠올리듯 나는 필름포럼에 갈 때 어쩔 수 없이 따뜻함을 떠올린다. 기억은 공간에 각인된다. 그 아늑함이 정신없던 상황에서 생긴 착각이라고 해도 이제 그 따뜻함을 느낄 수 없다고 해도 필름포럼에 갈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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