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바로 걷는 법이 아니라 넘어저도 다시 일어나는 법-<언어의 정원> 리뷰
오늘도 어느 날

똑바로 걷는 법이 아니라 넘어저도 다시 일어나는 법-<언어의 정원> 리뷰

by 하노(hano)

주관적해석과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약간 으슥한 골목에 간판이 없는 작은 칵테일바. 조명이 어둡고, 표면이 거칠한 벽면, 의자와 테이블은 약간 낮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반대편에 앉아 있는 상대와 얼굴이 가까워진다. 주황빛 조명에 비친 흰 얼굴과 그림자가 조화롭다. 반대편 벽면에는 영화가 틀어지고 있다. 과연 어떤 영화가 어울릴까?  <사랑과 영혼>, <비포 선라이즈> 같은 영화는 종종 카페나 칵테일바에서 배경으로 틀어지곤 한다. 특유의 감수성을 갖고 있는 영화이면서, 어느 장면을 틀어도 공간을 특별한 공간으로 느껴지게끔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영상미를 가진 영화이다. 여기 이 영화는 장마철, 배경으로 틀어놓고 싶은 영화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너의 이름을>로 우리나라에서도 유명세를 탄 감독으로, 훌륭한 작화로 유명하다. 특히, 현실 공간을 그대로 갖고 온 듯한 배경과 유려한 빛 활용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언어의 정원>에서도 감독 특유의 스타일이 돋보인다. 6월부터 8월까지의 일본 장마철 도시의 모습이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게 표현된다.

 

  미아

 감독의 모든 영화를 본 것은 아니지만 작품에서 반복되는 것은 스타일뿐만이 아니다.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 역시 비슷하게 반복된다. 창작자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주인공을 선택하게 된다. 주제가 반복되면서 그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의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게 된다. 바로 '미아'라는 점이다.

 미아라는 것은 꼭 복합쇼핑몰에서 길을 잃은 어린아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몸은 자랐어도 어른이어도 미아일 수 있다. <언어의 정원>에는 두 남녀 주인공이 등장한다. 고등학생이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아키즈키는 구두 장인이 꿈이다. 아키즈키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문학 교사인 유키노는 특정 사건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후유증으로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미각을 잃었다.

 두 사람 모두 길을 잃은 미아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 다 발과 관련된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발'은 전통적으로 자아, 자유를 상징하는 상징물이다. 발을 보호하는 구두에 집착한다는 것은 아직 독립하지 못하고 빨리 어른이 되길 희망하는 아키즈키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반면 제대로 걸음을 걷지 못하는 유키노는 성인임에도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미성숙함을 지닌 인물임을 상징을 통해 보여준다. 한 사람은 겉보기에 의젓해 보이지만 주변에 좋은 본보기가 없어 시간을 들여 성장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내면에 어린아이를 그대로 간직한 채 길을 잃은 미아, 다른 한 사람은 스스로 고난을 헤쳐본 적 없어 주변에 도움 없이는 제대로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미아다.

 

  만연집

 아키즈키는 유키노는 만난 순간 직감적으로 자신과 동류임을 알아차린다. 그녀에게 유대감을 느낀 아키즈키는 어느새 그녀를 만날 수 있는 비 오는 날만을 기다리게 된다. 그것은 유키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키노는 매일 출근하기 위해 정장을 차려입고 길을 나서지만,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 채 정원으로 향하고 만다. 비가 오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정원에 갔을 때 아키즈키를 만나게 된다. 유키노는 '하늘에 천둥이 여리게 울리니 드리운 구름에 비라도 오려나. 당신을 붙드네.'라면 뜬금없는 말을 남긴다.

 이는 만연집에 실린 시구로 비가 오면 내 곁에 머물러주겠냐는 물음에 비가 오지 않더라도 그대가 원한다면 함께하겠노라라는 응답을 하는 시다. 이는 아침에 비가 오는 날에만 정원에 찾아오는 아키즈키에게 유키노가 남긴 질문으로 그녀 역시 아키즈키에게 유대를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연집의 시구를 통해 영화를 보면, 그들이 스스로 만든 규칙에 얽매여 있다가 그 규칙을 깨부수고 한 걸음 나아가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다. 길을 잃은 미아가 길을 찾아 나서는 한 걸음이다.

 

하늘에 천둥이 여리게 울리니 드리운 구름에 비라도 오려나. 당신을 붙드네.
하늘에 천둥이 여리게 울리고 비님이 안 와도 이몸은 있겠네. 그대가 원한다면.

 

 

  다시 일어나는 법

 마지막 장면에서 유키노는 아키즈키를 쫓아 맨발로 뛰쳐나간다. 처음에는 이 장면을 보고 드디어 유키노가 성장하여 자신의 두 발로 똑바로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유키노의 발은 맨발이라는 점, 제대로 뛰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그녀가 여전히 맨발이라는 것은 아직 자아를 되찾지 못했다는 의미이며 뛰다가 넘어지는 것은 아직도 미성숙하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키즈키를 향해 다시 일어나 뛰어나간다. 그래, 마법처럼 한순간에 성장하는 일은 없다. 어쩌면 영원히 안고 가야 할 숙제일지도 모른다. 평생 노력해도 고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똑바로 걷는 법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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