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7] 부산행
오늘도 어느 날

[2020.08.17] 부산행

by 하노(hano)

 

 나는 지금 부산 해운대에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스태프로 채용되어 17일에 부산행 기차를 타게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캐리어에 짐을 넣었다. 지금은 여름이지만 계약이 만료되는 10월 말에는 가을이기에 어떤 계절에 맞춰 옷을 챙겨가야 할지 고민되었다. 우선 여름옷을 중심으로 챙기고 가을 남방 하나를 더 넣었다. 14시 출발 기차였는데 1시 20분쯤에 역에 도착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에 무척 배가 고팠다. 식당에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도시락을 사자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은 애매한 시간이었다. 결국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도시락을 사서 기차에 올라탔다.

 도시락과 에세이 한 권, 카메라와 함께 부산으로 출발했다. 4년 만에 다시 영화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것도 언젠가는 한 번 꼭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영화제에서. 언젠가 내 마지막 영화제 활동은 부산국제영화제 또는 서울독립영화제가 아닐까 상상해본 적 있었다. 설레는 마음과 함께 기차가 출발했다.

 

(2020.08.17)

 

 

 광복절 이후로 코로나 확산세가 극심해졌다. 결국 재택근무로 전환되었다. 출근을 한 번도 하지도 못하고 호텔에 머무르게 됐다. 무엇을 할지 막막했다. 방치되어있는 블로그도 걱정이었다. 블로그도 불렛저널도 관리를 못하고 있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부산까지 내려오게 된 계기가 된 장소에 가보기로 했다. 인스타그램을 보던 중에 아세안문화원에서 하는 풍등 전시 사진을 보게 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 근무 중이던 지인에게 전시회에 대해 알려주었다. 이 알림을 계기로 연락을 꾸준히 주고받다가 부산국제영화제 스태프 채용 공고 소식을 전해 듣고 부산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19일부터 전시회가 예약제로 전환되었다. 전시장 폐쇄가 안 된 것만으로 감사했다. 다만, 예약 시간을 착각하는 바람에 1시간의 공백이 생겼다. 아세안문화원에 지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얼그레이를 주문했다. 오랜만에 불렛저널을 펼쳐서 밀린 일기를 적었다. 지난주 금요일이 마지막 기록이었다. 주말에 후배를 만난 것, 월요일에 부산에 내려올 때 마음, 재택근무 소식을 들었을 때의 당황스러움 등을 적고 나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적고 나니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시간에 맞춰 전시회장에 들어갔다. 어두운 공간에 양쪽 벽이 무용 연습실처럼 거울로 되어있었다. 세로로 긴 직사각형 모양의 공간의 가운데에는 수영장처럼 물을 담아둔 수조가 있었다. 야트막한 깊이로 투명한 물이 찰랑거렸다. 곧 이어 띵- 하는 종소리가 울리고 천장에서 풍등 하나에 붉은 불이 켜쳤다. 뒤이어 풍등에 불이 켜지고 눈높이까지 내려왔다가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거울인 벽면을 바라보면 풍등이 무한히 펼쳐지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찰랑거리는 물속에도 빨간 풍등이 일렁거렸다. 전시회장 안이 풍등으로 가득해졌다.

 사방이 검은 작은 공간에 오로지 붉은 풍등과 나만이 존재했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입안에는 방금 마신 홍차향이 머금어져 있었다.

(202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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