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쓰는 글: 무보수 노동
오늘도 어느 날

보고쓰는 글: 무보수 노동

by 하노(hano)

 

 혹시 욕먹어가면서 일해본 적 있는가? 아니, 표현이 다소 거칠었다. 흔히 말하는 폐급이라 일 못 한다고 혼나면서 일한 적 있느냐고 묻는 질문이 아니다. 주변에서 만류하는 일을 해본 적 있는가? 다들 안 되는 일이라고 혹은 왜 하느냐고 묻는 일을 해본 적 있는지 물어보는 질문이다. 아마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보통은 안전한 선택을 하기 마련이니까. 결국 이 질문은 남들이 말리더라도 내가 좋아서 해본 적 있는지를 묻는 질문인 것이다.

 만약 위의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심으로 뭔가를 좋아하고 직접 실천한 경험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나로 예로 들면 다들 수시로 대학 편하게 가라고 할 때 무모하게 문예창작학과 실기전형을 지원한 경우가 그럴 것이다. 의외로 제법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위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또 던져본다. 무보수로 노동력을 제공한 적이 있는가?

 어제 <봉준호를 찾아서>를 보고서 나는 뭔가를 저렇게 간절히 바라고 열심히 해본 적 있는지 반추해보았다. 나는 학창 시절 그런 경험이 없었던 것 같아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내가 해온 일들을 보면 통일성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서 작가가 될지, 국어 교사가 될지, 한국어 강사가 될지, 도서관 사서가 될지 수많은 직업들 사이에서 선택을 내리지 못했고 돈을 벌기 위해 3년간 서울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영어 과외를 했다. 벌써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영어 과외라니, 그러고는 갑작스럽게 영상을 복수 전공했다. 그다음에는....

 

 아! 한 가지 열심히 한 일이 있었다. 복수전공을 한 뒤에 2년 정도 휴학을 했는데 그동안 한 일이 있다. 휴학을 하고서 거의 1년은 과외만 나가고 집에서 시간을 허비했다. 보통 영화를 다운받아보거나 소설 필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도저히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 독립영화관 탐방이었다. 서울에 있는 독립영화관 예술영화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필름포럼을 시작으로 아트하우스 모모, 지금은 폐관한 광화문의 스폰지하우스, 시네큐브, 서울극장과 인디스페이스 등등. 그러던 중에 우연히 극장에서 '인디애니페스트' 팸플릿을 발견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인디애니페스트를 보러 갔다. 독립애니메이션 영화제였다. 내가 간 날은 하필이면 영화제 폐막식 날이었다. 나는 폐막식이 뭔지도 모르고 일단 표를 끊었다. 주변에서 시간을 죽이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만 빼고 서로 일면식이 있는 것 같았다. 홀로 외지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분이 영 썩 좋지 않았다. 그냥 돌아갈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폐막식에 참석했다.

 수상작과 폐막작을 상영한 뒤에 자원활동가들이 무대에 올랐다. 그러고는 한 명씩 인사를 하고 소감을 말했다. 모두가 밝은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행사장에서 고생하고 난 뒤라 표정이 어두울 만도 한데 모두 즐거워 보였다. 마지막 자원활동가까지 인사를 마치고나 차 박수가 쏟아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저 일을 하면 즐거울까 생각했다. 나는 홀린 듯이 그해 마지막 남은 영화제의 자원활동가 모집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지금은 쓰지 않을 방식의 절절한 장문의 자소서를 제출했고 서류를 통과하고 면접을 봤다. 면접장에서 왜 지원했냐는 질문에 나는 인디애니페스트 폐막식에서 본 광경을 이야기했고 나도 저렇게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절실해 보였는지 나는 운이 좋게 합격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폐막식 날 자원활동가들이 웃는 것은 병장이 전역 날 웃는 것과 비슷한 의미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고생 끝났다는 해방의 웃음이었다는 사실을. 상영팀 자원활동가 일은 힘들었다. 밥 먹을 시간도 촉박해서 급하게 돌아가며 밥을 해결했고, 상영관이 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해는 출근할 때와 점심 먹을 때, 딱 두 번밖에 볼 수 없었다. 제대로 앉을 자리도 없어서 혹시 지나가는 관객이 볼까 비좁은 복도 바닥에 여럿이 숨어 옹기종기 앉아 쉬었다. 더 군다가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던 나는 아침 일찍 출발해서 저녁 늦게 집에 도착했다. 퇴근할 때면 몸이 지쳐있었다. 그리고 2주간의 노동 끝에 폐막식 날이 왔고 나도 인디애니페스트 자원활동가들처럼 스크린 앞에 서서 웃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이후로도 나는 총 7번 더 영화제에서 일했다. 비록 몸은 고되고 돈은 안 되지만 즐겁고 보람 있었다. 여러 차례 일하다 보니 인정도 받고 보수를 받고 일하는 스태프도 했다. 다음에도 같이 일하자는 제안까지도 받았었다. 돈이 결부되면 일을 순수하게 볼 수 없다. 돈이 발을 걸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경제적 손익을 따져보게 된다. 이 일이 내게 도움이 될까? 이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효용성이 판단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만다. 하지만 돈과 상관없는 일을 해본 사람은 안다. 그 일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일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그렇지만 나의 일은 방향성이 없었다. 누군가가 마련한 행사에 구성원으로 참가했고 정확한 성적 지표로 삼을 것이 없었다. 그저 관객과 감독, 스태프와 자원활동가 모두가 즐거운 영화제를 만들자는 마음뿐이었다. 그야말로 목적이 없는 무목적성 그 자체였다. 이제는 나의 커리어를 위해서 방향성에 대해 생각해야 할 시기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봉준호를 찾아서>를 통해 '이렇게 열정을 갖고 뭔가를 간절히 바라고 노력해본 적 있어?'라는 질문을 받은 것처럼 당당하게 질문을 던지지는 못할 것 같다. 대신 조심스럽게 이렇게 물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너 돈 안 받고도 일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하는 일 해본 적 있어?

 


 

 

<봉준호를 찾아서(Searching for Bong)> - 나에게도 이런 행동력을

※ 주관적해석과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목차] 줄거리 일화 초심을 위한 처방 약 줄거리 시놉시스 훌륭한 영화인이 되고 싶은 우리의 꿈과 달리 어른들이 말하는 영화판은 험난하기만 �

han-oneday.tistory.com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오늘도 어느날

하노(hano)

활동하기